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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문화와 전문직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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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의료정책연구원
조회 3,171회 작성일 20-06-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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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문화와 전문직 양성

 

일본이 처음으로 서구문명을 접한 것은 에도 혹은 도쿠가와 시대로 19세기 중후반인 1868년 쇼군의 지배체제하의 경제 사회 문화적 전성기와 더불어 당시 일본의 고립주의와 함께 엄격한 사회적 질서가 유지된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의사의 사회적 위치는 사무라이 계급보다 낮은 하위계층으로 지역마다 자유로운 형태의 직업인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일본은 공중보건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였고, 의사는 아픈 환자와 개인적 관계가 중심인 반면에 사무라이는 직급에 따라 관할 지역의 봉건영주로 일종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사는 주로 공중(Public)’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현대적 개념에서 보면 평상시에는 공무원의 역할을 유지하면서 전시에는 군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공인인 셈이다.

 

과거 일본의 의사들이 서구의 의학을 접하였기는 하였으나 서구처럼 의사들이 모여 길드를 형성하지는 않았고, 의사의 지역별 이동도 자유로워 의사가 되기 위하여 학생들이 여러 곳을 방문하며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고 통상적인 일이었다.

 

물론 의사 지망을 원하는 학생의 친부는 당연히 의사였다. 일본 의사는 대부분 산술점성가(mathematical astronomer) 집안과 같이 대를 이어 물려주고 이어받는 세습제가 기본이었다고 한다.

 

사무라이는 일종의 무관 엘리트(military elite)집단으로 세습제 형태로 조상의 공적에 따라 자손들의 직위와 급여가 결정되었다.

 

장인과 상인들도 대부분 대를 이어 세습하는 방식이었고 신분이나 계층의 이동은 지금도 쉽지 않다고 한다.

 

에도시대 일본의 서양의학 기초과학 등 타 분야 학문과 융합 국가 근현대화 원동력

에도시대 3대 전문직을 꼽으면 유학자(confucian scholar), 의사, 그리고 산술점성가였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 사회에 필요한 전문직이었고 사무라이 계급 아래에 위치하였다. 에도시대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데 의사들의 기여도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타 직종에 비하여 비교적 자유로웠고 서구의학을 접하면서 깨닫게 된 기초의학이나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의 중요성과 외국어에 대한 필요성이 상당수 의사가 의사의 신분에서 서구의 언어나 과학을 전파하는 교육자 역할을 하여 일본사회의 계몽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도쿠가와 시대 의사의 영향은 조직적이지 못하였고, 정식으로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해서 운영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의 전통적 의학은 중국의 양향을 받아 궁중과 관료주의 속에 성장하여온 문화로 서구의 과학적 의학기술적 의학으로 자리 잡았으나 전통적 동아시아의 도덕관이 당시 의학을 자연스레 지배하여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일본의 의학은 서구의 지성과 학문의 정신으로 계승된 것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해하면 맞을 것 같다.

 

중국이 아편전쟁(1839~1842)에서 패배하고, 이어서 미국의 페리호가 일본에 진입하여 개방을 요구함에 따라 당시 사무라이 계급으로서는 일본의 국가방위를 위해 서구 과학의 힘의 필요성을 재빨리 인지하게 되었다.

 

사무라이들은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이었고 전쟁이 발발하면 자동적으로 군인으로 변신하는 전통 무사집단으로 시대의 변화를 재빨리 감지하고 의사들이 설립한 서구학문 교육기관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받은 비정규 단기 교육을 통해 서구식 대포를 구입하거나 어느 정도는 직접 제조도 가능하였으나 이런 교육의 한계를 인지하면서 서구 군사교육의 정통성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도쿠가와 가문에 반대를 시도하는 사무라이에 의하여 에도시대를 마감하는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 사무라이에게는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배우는 것이 곧 사무라이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바뀌었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근대적인 서구식 교육기관이 생기면서 점차 의사에 의한 일본사회의 계몽이 사무라이 지배계층으로 주도권이 이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무라이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의 핵심 권력을 쥔 가문으로부터 급여를 받아왔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이를 금하게 된다.

 

이로 인해 당장 생계에 문제가 되기 시작한 사무라이들은 기존의 세습제인 의사나 장인, 농업 분야의 기득권 분야의 침투보다는 새로이 등장하게 된 과학과 기술 분야에 눈을 돌려 새로운 영역에 활발히 진출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세습이 아닌 신학문 분야인 이공계열의 초창기 졸업생은 거의 대부분 사무라이 계급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공중의 사안이 주된 관심이던 사무라이 정신이 새로운 과학기술의 역량이 합쳐지면서 사무라이 정신에 의한 일본의 근현대화에 큰 힘을 받아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하생략)

*원문보기 : 헬스포커스 http://www.health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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